헤어져주세요, 소중한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
뒤늦은 깨달음 '이별을 위해 필요한 건...'
송혜진 / 조선일보 기자

 

새벽 3시, 만화책을 읽다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. '너는 펫'의 주인공 스미레가 허리를 90도로 굽혀 절하며 말하고 있다. "헤어져주세요, 소중한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." 정중한 이별의 말, 그 앞에서 정작 황망해 한 건 스미레를 아끼고 사랑해줬던 애인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.


아주 오랫동안 만나온 사람에게 언젠가 나도 저런 말을 했었다. 정중하진 못했다. 다만 냉정했을 뿐이다.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은 말의 행간에 다 들어갈수조차 없었지만, 행간을 열어보일 용기도 없었다. 그가 무너지면 나도 무너질 것 같았다. 짧게 잘라내듯 말했다. "헤어지자, 다른 사람이 더 좋아졌어." 상대방은 말 없이 받아들였다. "잘 지내라" 긴 연애의 종지부치곤 밋밋하고 싱거웠다. 아프다는 것을 실감한 건 그 후로도 몇주가 지나서였다.


스미레는 이별의 말을 하기 전 심하게 앓았다. 밤새 악몽을 꾸었고, 사람들과 싸웠고, 끊임없이 초조해했다. 헤어지는 이유는 그가 미워서가 아니었다. 그가 싫어져서도 아니었다. 사랑했고 늘 고마웠고 여전히 기대고 싶지만, 그녀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이는 다른 사람이었다. 결국 스미레는 이별의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. 그리고 고개 숙여 진심으로 말했다. "헤어져주세요, 소중한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"

그는 마침표 후에 차마 이어지지 못했던 말을 들었을 것이다. '고맙습니다', '사랑합니다', '사랑했습니다', '행복하세요' 같은 입 밖으로 말하기엔 너무 당연하고 벅찬 말들을. 그는 그래서 결국 말한다. "눈물이 날 것 같네"


처음으로 후회했다. 나의 정중하지 못했던 이별의 순간을. 차마 입 밖으로 할 수 없었던 수많은 말들을 그래도 전달하기 위해서 어쩌면 난 스미레처럼 허리를 굽혀 절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. '고마웠어, 사랑했어, 행복해, 너같은 사람은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야'.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다면 몸짓으로, 예의바른 모습으로 보여줘야 했을텐데, 마지막 인사를 하는 내 모습이 약해보일까만 걱정했다. '너는 펫'을 보며 뒤늦게 깨달았다. 이별을 위해 필요한 건 눈물이 아니라 예의라는 걸. 내 차갑기만 했던 이별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.

Updated : 2009.02.11 15:23